[86] 한얼- (16) 고조선의 정체

김운회의 '우리가 배운 고조선은 가짜다' <출처>역사의 아침
고조선은
은나라(동이족)의 방계국으로
주나라(한족) 초기에는 사신을 보낼 만큼
일정한 국체를 가졌으며
은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은의 유민과 결합해
확대된 고조선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은
신화의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다.
고조선의 역사는 유장하다.
후대 한반도 왕조보다 역사가 길다.
고기(古記)에 나오는 왕검성과 패수는
고조선의 정체를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패수와 왕검성은 어디에 있었나.
『사기』에 “패수가 고조선과 한나라의 경계”라고 기록돼 있다.
고조선의 영역은 패수의 위치를 찾는 것이 핵심이다.
『수경』에 “패수는 낙랑 루방현에서 나와 동남을 지나
패현을 거쳐 동으로 바다로 들어간다”고 기록돼 있다.
루방에서 나와 동쪽 바다로 흘러간다는 말이다.
패수는 란하(루엔허) 또는 대릉하, 또는 그 인근의 강이다.
고조선의 도읍지는 왕검성이다.
『사기』에는 “(고조선이) 왕험에 도읍을 정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한 주석으로 “창려에 험독현이 있었다”(서광)는 사실에 주목한다.
고기의 왕험 왕검성(사기), 험독(한서)은 같은 곳을 지칭한다.
상기 주석에서 신찬은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이다”라고 했는데
이곳이 창려이다. 창려는 현재 북경 동부 해안 지역이다.
고조선의 중심지(왕검성 또는 험독)는 넓게 잡으면
현재의 북경 동부 연안인 란하에서부터
대릉하 유역 - 요하 서쪽 지역까지 그 존재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고
고조선의 주요 영역은 한반도의 평양이 아니라
루엔허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이다.
왕검성을 평양, 패수를 청천강으로 보는 것은
사대적인 소중화사상의 발로이다.
기원전 3세기 이전 고조선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은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의 주나라가 쇠퇴해지자
연이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으로 공략을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했다는 기록이다.
이것이 중요한 사실은 조선이 스스로 왕을 칭했다는 점으로
사료상으로 보는 고대국가 고조선의 실체이다.
고조선은 전국 7웅과 유사한 제후국 형태를 유지하다가
기원전 4세기경에 이르러
이미 본격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이란 단어는 고대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고조선(古朝鮮)이란 명칭은
고려시대『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했고,
그 뒤에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고조선에 연관된 조선이란 단어는
『관자』에 처음 나온다.
기원전 7세기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은 발조선이며
그들의 위치는 현재의 북경에서 요하에 이르는 지역이다.
발조선의 구체적인 모습은 사료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그 지역은 중앙아시아에서 발달된
청동기와 금 은 세공기술의 이동 통로로 바파형 동검을 사용하고
신화적으로는 남방계(난생)와 북방계(천손)의 혼합 지역이며
반농반목의 산업기반을 바탕으로 온돌문화를 발달시킨 지역이다.
고조선은 동이족이라는 말 보다 먼저 사서에 등장한다.
물론 그 기록들이 너무 피상적이고 단편적이어
여러 가지 해석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고조선과 코리국(까오리국)은
이미 동이족의 대표적인 왕국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동이족 역사의 기반이 고조선이고 코리국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이족은 큰 범주에서 보면
알타이-몽골-만주-한반도 등지에 이르는 지역에서 번성한 민족으로
언어나 혈연, 문화적인 공통성이 강하게 나타나
동일계열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방대한 중국의 사서에서 이들을 동이족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들 동이족 가운데서도 선비와 숙신이 수당시대 이후
중국 대륙의 지배자로 등장했다.
고조선의 뿌리는 예맥이다.
예맥은 요서-북만주에 걸쳐 활동했고
이후 부여와 고구려 전연 북위 등을 건국한 역사주체이다.
예맥은 『관자』에 처음 나타난다.
이 책에는 “제나라 환공이 북으로 고죽, 산융, 예맥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것이 예맥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한국인의 직계 조상으로 예맥과 동호가 다르지 않다는 것은
1960년대 사가 이지린 이 분석한 바 있다.
그는 동호=맥으로 보고 맥과 예는 고대 조선 종족으로
예족은 기원전 8-7세기 이전에 고조선을 세웠고
맥족은 그보다 늦게 부여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동호란 흉노 동쪽 지역(요성 및 만주)의 부족을 통칭한다.
결론적으로 『진서』『요사』『당서』 등의 기록들은
고조선이 동호이며 후일 요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우리 민족의 선조는 좁은 한반도에서 머물지 않고
넓은 북방 벌판에서 역사를 썼다는 의미이다.
기원전 3세기에 편찬된 『여씨춘추』에는
“북쪽 바닷가의 동쪽인 이예(夷穢)지방에서는 큰 게와 릉어가 난다”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예는 바로 고조선이나 부여의 건국 주체로 나타나는
동이족의 예족을 의미하므로 이 기록으로부터 고조선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즉 북쪽 바닷가는 발해이므로 “북쪽 바닷가의 동쪽”은 발해의 동쪽이 돼
심양이나 요양지역을 예족의 영역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해서는 예족이
이미 요동 지역으로 많이 이동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맥은 원래 예가 거주한 요하 동쪽에,
요서나 중국 북방의 맥이 이주해 예맥을 형성했지만
예맥이 언제 어떻게 하나의 종족 집단을 이루고 동으로 이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기 기록에 예맥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종족 연합체로 등장하고
흉노와 동쪽에서 접경한 사실에서 기원전 3-2세기 예맥이 하나의 종족으로 존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부여와 고구려가 나왔다.
고조선의 후예들은 기나긴 동아시아 역사에서 대륙의 지배자가 되기도 했고(선비)
한반도와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발전과 균형에 새로운 역할을 하기도 하고(부여)
21세기 디지털 세계의 허브가 되고 기술적 리더가 되기도 한다.
고조선의 역사는
현재의 북경 인근에서 요서 요동을 거쳐
한반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지역은 북방인들의 허브이자 이합집산의 영역이고
유목민들과 농경민들의 경계면이기도 하기 때문에
고조선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리고 고조선의 멸망 이후
고조선 지역이 고구려와 선비 등으로 분리되면서
고조선의 역사는 크게 두 갈래로 분리됐다.
한쪽은 서족으로 중국 대륙을 향해 나아가고
다른 한쪽은 한반도와 일본으로 나아갔다.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 멸망했다.
제대로 된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졌다.
흉노와 더불어 만리장성 이북을 지배했던 고조선의 붕괴는
거대한 유민의 파도를 일으켰다.
한 갈래는 고조선 옛터에 남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여에서 유입된 세력들과 함께 고구려를 태동시켰다.
다른 갈래는 고조선 북부에서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선비나 오환 등으로 불리며 할거했다.
즉 고조선의 고유성은
주로 고구려, 거란, 금, 고려, 청 등에 의해 유지됐다.
나라는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
중국은 요하운명론과 동북공정을 내세워
우리의 반만년 역사공동체의 뿌리마저 뒤흔들리고 있다.
한국인들의 역사공동체의 유래와 흐름을 제대로 복원하고
이를 인류사회가 공지의 사실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
중국정부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일관된 논리는
중화주의의 깃발아래 동북아, 더나아가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전쟁은
범 알타이인(알타이, 몽골, 만주, 한국인)들의 역사에서 전개되고 있다.
최근 중국은 발해를 독립된 국가가 아니라 발해도독부로,
당나라의 침입을 막은 고구려 박작성을 호산장성으로 둔갑시켜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 동검은 한족이 발전시켰으며
이를 통해 한반도와 일본의 문명발전에 기여한 듯이 묘사하고 있다.
만주와 한반도, 시베리아의 역사는 한족의 역사와 분명히 다르다.
과학적 자료 검증이나 실증으로 중국의 역사전쟁에 대응해야 한다.
역사의 상실은 민족의 소멸이다.
<창려, 적봉, 심양에서 대한국인 한재 신충우>
이글루스 등재 : 2012/05/13
티스토리 이전 : 2023/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