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 신충우 파일 35

 

 

 

충남 예산에 있는

추사 김정희 고택 중에서

필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안채의 6칸짜리 대청(大廳)이다.

 

6칸짜리 대청은

초가삼간의 두배 크기다.

초가삼간(草家三間)이란

2개에 부엌 하나로 구성된

썩 작은 초가를 이르는 말로,

과거에 서민이 살던 집을 상징한다.

 

추사 고택은 전체 집칸수가 53칸이므로

집 규모에 비해 대청이 크다고는 볼 수 없다.

 

 

서울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대청<사진 출처>이미지 갤러리

 

 

대청(大廳)은 마루 중에서

넓은 마루라는 의미이다.

대청마루라고 하는 사람도 많으나

대청이라는 명칭 속에

마루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으므로

대청마루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

 

대청은 대개

안채의 안방과 건넌방 사이나

사랑채의 사랑방과 건넌방 사이에 놓인다.

여러 방을 연결하는 넓은 공간으로

오늘날의 집 개념으로는 거실에 해당한다.

안채에 있는 대청을 안대청이라 하고

사랑채에 있는 대청을 사랑대청이라 한다.

 

이들의 위치는 주로

각 채의 중심부에 배치돼 있다.

공간적인 측면에서도

다른 방을 지배하는

중심적 생활기능을 가지고 있다.

 

안대청은

하인이나 몸종에게 각종 지시를 하거나

자신이 소일하는 공간으로

안주인의 권위를 상징한다.

하인이나 몸종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며

가까운 측근 정도만 출입이 가능하다.

안방과의 건넌방과의 사이에

모두 들어열개로 된 불발기를 달고

안마당에도 들어열개로 된 분합문을 달아

여름에는 모두 접어 들쇠에 매어단다.

 

또한 발을 늘어뜨려

마당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하고

바닥에는 돗자리를 깐다.

대청의 양모퉁이에는

보통 사방탁자와 뒤주가 놓이는데

집안의 큰일이 있을 때는 이 대청이 중심이 된다.

 

사랑대청도

사랑방과 건넌방을 비롯해

누마루를 출입하는 중심공간이다.

윗목에는 사방탁자를 놓고

여름이면 바닥에 화문석을 깔며

창호는 모두 접어 들쇠에 매달고 발을 드리운다.

때로는 살평상을 들여놓는데

죽부인을 놓아두고 잠잘 때 안고 자기도 한다.

이 사랑대청도

바깥주인의 중심 공간으로

측근에게만 출입할 수 있도록 한다.

 

대청을 크게 만드는 이유는

조선시대에는 여기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지체가 높은 양반가일수록 대청이 넓다.

신분의 상징성과 권위성을 나타내는 장소로,

보통은 4칸 대청이지만

대갓집에서는 6칸 대청을 둔다.

대청의 천장높이는 보통 10척 정도로

한국인 평균 신장의 두 배이다.

 

무더운 한 여름 

솔바람이 불어오는

대청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있노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대청은 우물마루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전면은 트여있고

뒷벽은 우리판문을 다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판문을 열면

여름에는 시원한 뒷산의 바람이 건너온다.

또 방과 대청 사이에는 분합문이 달려 있어서

여름에는 전체를 들어 걸어

방과 대청을 넓게 하나의 공간으로 쓰기도 한다.

전면에서 방으로 직접 들어갈 수도 있으나

한옥에서 대청을 통해

방으로 출입하도록 하는 것은

잠시라도

외부와 내부의 온도 차이를 적응하면서

들어가도록 하려는 세심한 배려이다.

 

 

추사 김정희 고택<사진 출처>연합뉴스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생가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8에 위치한다.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金漢藎)이 지은 집이다.

김한신(1720-1758)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金興慶)의 아들로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

월성위에 봉해지면서 이 일대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집 규모는 53칸인데

영조는 충청도 53군현에서

한 칸씩 건립비를 부담해 지어주도록 했다.

이것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보면

착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고택은

그 중 일부만 1976년 복원한 것이다.

흉물처럼 방치됐던 고택은

복원하면서 규모가 절반으로 줄어들어지만

모습은 정갈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김정희 선생 고택으로 문화재 등록이 돼 있다.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43.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자형의 사랑채가 나타난다.

화단에는 추사가 해시계 받침대로 썼다는

육각 돌기둥이 서 있다.

기둥에는 石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사랑채에는 온돌방이 세 칸 있고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다.

사랑채 마루 위 벽에는

추사의 대표작인

세한도’(歲寒圖) 복제본이 걸려 있다.

겨울날 소박한 집 한 채 좌우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서 있는 그림이다.

대청에는

추사의 글씨를 담은 액자들이 걸려 있다.

 

사랑채 뒤편에는 안채가 있고,

그 뒤로는 영당이 자리한다.

 

안채는 6칸 대청과 2칸통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으며,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갖춘 자형의 집이다.

안방과 건넌방 밖에는 각각 튓마루가 있고

부엌 찬장은 다락으로 구성돼 있다.

 

영당에는 추사의 제자이자 화가인

이한철(李漢喆)이 그린 초상화(복제본)가 있다.

국가 중대사 때 입는 대례복 차림의 나이 든

추사가 인자하고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다.

 

김정희는 안채에서 태어나

이 고택에서 7살까지 지냈다.

 

 

<‘연구가/여행작가 한재 신충우>

 

이글루스 등재 : 2021/12/17

티스토리 이전 : 2023/06/11

Posted by 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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