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 신충우 파일 43
 
 

 

 10익산 5층탑전주 경기전서산 3존불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은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 초기 등

여러 설이 제기되었으나

1965년 탑의 해체·보수 작업 때

기단의 구성 양식과 기단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 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확인된 것이다.

 

 

익산5층석탑<출처>https://blog.naver.com/drkdc

 

 

조선 말기에 간행된

익산읍지인 <금마지(金馬誌)>에 의하면

용화산(미륵산)에서 남으로 내려온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왕궁평이 있는데 그 곳에 석탑이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전북 익산시 왕궁면 궁성리에

소재한 이 5층 석탑은

풍수적으로 개꼬리에 해당,

반역의 기운이 있는 곳이라 해서

고려 개국 초에 이 곳에

탑을 세웠다는 설이 있다.

 

1단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린 석조 불탑으로

국보 제289호이다.

 

반역의 기운은

탑을 세워 누른다고

눌러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 반증이

전주에 소재한 경기전으로,

위화도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사당이다.

 

우리 역사에

이런 반역자는 없었다.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회군해 국권을 찬탈했다

그의 본관은 전주 이씨.

 

역사는 돌고도는 부메랑인가.

522년 후 그의 후손(27대 순종)

일본에 의해 이런 수모를 당했다.

그것도

같은 민족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 당했다.

외세()를 등에 얻고

조선을 건국했다가

결국에는 외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이성계의 경기전은 

사적 제339호로

태종이 1410년 창건했다.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이 사당은

세종 때 경기전(慶基殿)으로 바뀌고

임진왜란 때 불타

광해군이 1614년 중건했다.

소재지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

 

과 패권싸움을 한

견훤의 후백제 도읍도

지금의 전주인 완산주에 있었다.

 

고려 태조 왕(王建)이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제8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차현이남과 공주강외는

산형과 지세가 함께 배역으로 달리니

인심도 또한 그러한지라

저 아래 고을(주군)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를 변란케 하거나

혹은 통합된 원한을 품고

거동하는 길을 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며

또 일찌기 관사(관청)의 노비와

진역의 잡척에 속하던 무리가

혹은 권세에 붙어 이면하고

혹은 왕후궁원에 붙어

언어를 간교하게 하여 권세를 농하고

정사를 어지럽힘으로써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벼슬 자리에 두어

일을 보게 하지 말지어다

<출처>고려사

 

여기에 나오는

차현(車峴)은 현재의 차령신맥으로,

차현이남은 전라도 일대를 말한다.

즉 전라도 사람이라면

귀족의 경우는

혼사도 하지 말아야 하고

천민이면

방면해서도 안되며

양민이라면

절대 벼슬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유훈이다.

 

의 이러한 유훈은

조선시대에

이익의 <성호사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그대로 이어져

호남은 고려 이래

반역의 땅이라고 기록돼 있다.

 

선조 때 호남에서 일어난 정여립 모반사건

호남출신 인사의 관계진출을 어렵게 만들었고

왕권의 유훈을 더욱 정설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역감정 문제는 현재도 진행 형이다.

 

훈요십조(訓要十條) <고려사>에 수록된,

고려 태조가 후손에게 남겼다는 열 가지 가르침이다.

태조 왕건의 정치철학과 당시의 시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인 자료이다.

 

왕건의 훈요십조

1. 대업은 제불(諸佛)의 호위와

지덕(地德)으로 인함이니 사원을 보호 감독할 것.

2. 사원의 창설은 도선(道詵)의 설에 따라 함부로 짓지 말것.

3. 왕위 계승은 적자(嫡子), 적손(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마땅하지 아니할 때는 형제 상속도 가함.

4. 거란(契丹)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본받지 말것.

5. 서경은 길지이니 중시할 것.

6.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은 주 신을 함부로 가감치 말것.

7. 간언(諫言)을 받아들이고 참언(讒言)을 물리칠 것이며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여 민심을 얻을 것.

8. 차현(車峴)이남의 인물은 조정에 등용하지 말것.

9. 관리의 녹은 그 직무에 따라 제정하되 함부로 증감치 말것.

10. 경사(經史)를 널리 읽어 옛일을 거울로 삼을 것.

 

그러나

서산 삼존불을 보면

백제인의 미소가 읽혀진다.

빛의 굴절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보이는

삼존불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백제 특유의 우아함도 함께 간직하고 있다.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

가야산 계곡의 절벽 바위에 소재한다.

국보 제84.

 

공식명칭은 서산마애삼존불이다.

 

 

 

서산삼존불<출처>https://post.naver.com/my.nhn?memberNo=21155441

 

 

이 삼존불의 가장 큰 특징은

특유의 미소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입술을 드러내면서

눈을 크게 뜨고

뺨을 한껏 부풀린 모습의 여래입상은

백제인의 전형적인 미소를 보여 준다.

그것은 신라의 속깊은 미소와는

분명하게 다르다.

그 미소속에는 침묵이 있고 침묵 속에

사랑과 자비가 깃들어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이 불상은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미소짓는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마애불은 앞산 능선을 향해

조금 돌출한 면석에 새겨졌다.

돌출한 면석 위로는 모자챙처럼

앞으로 불거진 바위가 있어서

풍우에 노출된 석불을

그래도 얼마쯤은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었기에

천 년 전의 미소가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중앙에 석가여래입상

오른쪽에 반가사유상

왼쪽에 보살상이 조작되어 있으며

본존불인 여래입상의 높이는

본존상인 여래입상(높이 2.8m)

보살입상(1.7m) 반가사유보살상(1.6m)

3개의 불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 삼국시대에는

차령산맥 이북의 충청도도

차령산맥 이남의 전라도와 같이

같은 백제인이었는데.

  

올해 2021년은

백제 멸망(660)을 기준으로는

1361년이 되고

후백제 멸망(936)을 기준으로는

1085년이 된다.

 

필자의

16(신숙주)조부도

전남 나주에서 출생해 

전라도 출신이다.

 

그러나 필자는

충북 청주에서 출생한

충청도 출신이다.

서울에서 출생한

14대 조부(신광윤)

충청도로 낙향했기 때문이다.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투옥됐다가

중종반정으로 석방된 후에

청주로 낙향한 것이다.

 

16대 때 전라도에서 서울로 올라갔다가

14대 때 가까운 충청도로 내려 온 것이다.

 

내 핏속에는

전라도 성향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연구가/여행작가 한재 신충우>

 

이글루스 등재 : 2021/06/27

티스토리 이전 : 2023.06/12

Posted by 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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