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 신충우 파일 77 



신충우, 2012

 

 

집안에서 동북으로 약 4.5㎞ 떨어져 있다.

장군총(將軍塚)은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나

고구려 20대 장수왕(413∼491년)의 릉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특히 북한과 중국에서 태왕릉은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은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다.

 

장군총은 중국 사람들이 생각없이 붙인 이름이다.

크기로 봐서 어느 장군의 무덤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압록강 유역 통구 지방에 위치한

대표적인 돌무덤으로 7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이다.

기단의 한 변 길이 33m, 높이 약 13m이다.

세계문화유산이다.

 

그 앞에 서면

서남향으로 통구의 넓은 평야가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지관이 보면 명당이라고 할 것 같다.

장수왕(長壽王)은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후광에 힘입어

98세까지 오래 살아 그렇게 불린다.

 

재미있는 것은

집안의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왕도를 천도한 왕의 릉이

집안의 통구에 있다는 사실이다.

시신을 멀고 먼 이곳까지 운구해 오느라고

백성들이 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아니면 바다를 이용해 배로 운구했을까.

평양-대동강 -서해 - 압록강 -집안

 

고구려는 장수왕이 대동강의 평양성으로 왕도를 천도하기 전에는

왕도가 있던 압록강을 중심으로

서북쪽으로 요하강, 남쪽으로 한강이 사실상 국경선의 역할을 했다.

요하강을 따라 수·당을 물리친 용맹한

고구려의 백암성, 신성, 안시성, 요동성이 이어져 있다.

지금도 성의 흔적들이 꽤 남아 있다.

 

장수왕의 적극적인 남하정책은 같은 민족인 신라와 백제를 자극,

위축시키고 결국 후대에 가서 감정의 골이 깊어져

신라의 간계에 의해 나당연합군에 멸망하는 결과가 초래됐다.

2대 유리왕(BC19∼AD18년)이 임시왕도 성격의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남하 천도를 한 것은

현장의 지형지세로 보아 이해가 가지만

장수왕의 평양성으로의 남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 역사상 남하정책을 추진해 성공한 경우가 거의 없다.

경계심이 해이해져 그런 결과가 초래된 것은 아닌가. 

 

<집안에서 대한국인 한재 신충우(저술가)>

 

고구려전도<그림 출처 http://cafe.naver.com/strikess/4017>

 

[참고 자료] 고구려 돌무지무덤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축조방식이나 용재의 차이에 의해 다양한 세부 구분이 이뤄진다. 일반적으로 기단의 유무를 기준으로 삼아 무기단 돌무지무덤과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대별한다. 후자는 다시 외형상의 특징을 통해 단순기단식과 계단식으로 구분되고 또 계단식의 경우 내부 매장주체시설의 차이에 따라 돌덧널무덤[石槨墓]과 돌방무덤[石室墓]으로 세분된다. 이러한 무덤양식들은 돌무지무덤의 시기적인 변화를 반영함과 동시에, 같은 시기에 있어서는 신분에 따른 무덤양식의 차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한 무기단 돌무지무덤은 강가의 모래바닥에 냇돌을 사각형으로 깐 뒤 그 위에 관을 놓고 다시 냇돌을 덮은 간단한 형식의 것으로, 고구려 국가의 성립 이전인 BC 3세기경부터 조성됐다고 여겨진다. 땅을 고른 후 그 위에 넙적한 판석 등으로 기단을 마련한 것이 특징인 기단식 돌무지무덤은 AD 1∼2세기경에 출현한 것으로 파악되며 강가뿐만 아니라 산기슭에도 만들어져 있고 이에 따라 무덤축조의 재료로서 냇돌 외에 모난 산돌도 많이 이용됐다. 그리고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3∼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기단 위에 덧널의 구획을 잡고서 돌로 곽벽을 쌓아 올린 뒤, 그 벽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덧널의 둘레에 다시 돌을 쌓아 마치 새로운 단을 만든 것처럼 해놓고, 덧널의 윗부분을 몇 겹의 돌로 덮은 것이다. 이로 인해 무덤의 테두리를 이루는 기단 즉 첫째단과 덧널의 벽체를 이루는 둘째단, 덧널의 상층부를 이루는 셋째단이 외형상 계단 모양을 취하게 된다. 장군총과 같은 초대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에서는 계단의 숫자가 3단이 아니라 7단까지 이르기도 하며 이 경우 시체가 묻히는 장소는 둘째단이 아니라 정상부에 가까운 곳에 조성된다. 내부구조의 측면에서 볼 때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거의 대부분이 매장주체부를 지하나 지면에 바로 두지 않고 돌무지부 중에 마련하는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매장주체시설로는 흔히 돌덧널[石槨]이 설치되는데, 원래는 시체를 위로부터 묻는 구덩식[豎穴式]이 기본이었으나, 계단식 돌무지무덤 단계에 이르면 굴식[橫穴式]에서 볼 수 있는 널길[羨道]의 흔적이 나타나기도 하며, 장군총이나 태왕묘 등의 대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에서는 실제로 연도가 딸린 굴식의 돌방이 조성돼 있다. 축조 재료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주로 냇돌이나 산돌 등의 막돌을 이용한 것이 많았지만, 계단식 돌무지무덤 단계에 이르면 정성들여 다듬은 절석을 사용한 것이 출현한다. 이러한 절석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무덤축조에 들인 공력의 측면에서 다른 무덤양식을 압도하며 장군총의 예에서 보듯이 초대형인 경우가 많아, 대체로 왕이나 최고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재>

 

이글루스 등재 : 2012/05/02

티스토리 이전 :2023/06/14

Posted by 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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