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설적으로
몽골(원)과 일제는 우리에게 민족애를 일깨웠다.
민족애는 나라와 민족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발휘된다.
단군숭배와 민족사관은 그 결과의 산물이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고려시대에 대몽항쟁 등 민족의 단합이 요구되는 시대를 맞아
민족의 시조로 받들게 됐다.
신라시대는 박제상(363~419년)에 의해
이와 다른 마고신화(麻姑神話)가 제기됐다.
단군이 국조로 최초 나타난 기록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이다.
이 두 책은 모두 13세기 후반에 저술된 것이다.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이 단군과 관련해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을 찾기 어렵다.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는 『위서』『고기』 등을 인용하지만
실제로 정사인『위서』엔 단군 신화가 없고
『고기』는 정확히 어떤 사서들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다.
단군을 강화하는 현상은
고려 후기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일종의 민족적 정체성을 새롭게 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 이데올르기는 될 수 있지만
과학적 역사적 증거는 될 수 없다.
고구려, 백제, 신라 그 어느 나라도
역사적 출발을 단군 신화의 배경이 되는 고조선과 함께하지 않고
고조선과 어떠한 친연성도 나타나지 않는다.
단군이 민족 전체의 시조로 확실히 받들어진 때는 고려후기로
그 기점은 몽골(원)의 세계 지배와 관련이 있다.
『삼국유사』는 1281년(충렬왕 7)경에 고려 후기의 중 일연(一然)이 편찬한 책으로
이 시기는 대몽항쟁기다. 민중적 이데올르기가 필요해 단군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신화는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정치세력에 의해 보존되고 유지될 때 지켜진다.
그러나 단군 신화에 담긴 시베리아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곰 숭배 신앙의 변이 과정을 통해 민족의 분화와 융합을 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단군 숭배 사상은 고려 충렬왕 때 원에 대한 자립 의식으로부터 싹터,
조선 세종 때 평양에 단군 사당을 지어 고구려 동명왕과 더불어 추앙했으며
구한말 자주 독립사상이 고조될 때 발생한 대종교ㆍ단군교의 성립 배경이 됐다.
일제시대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민족주의사관(民族主義史觀)이 대두됐다.
우리 민족의 주체성ㆍ독창성ㆍ우월성을 강조하는
사관 한국인의 전통적인 정신세계를 강조해
낭가(신채호),
혼(박은식),
얼(정인보),
조선심(문일평),
조선정신(최남선)을 부각시켜
우리 역사의 원동력을 중시했다.
신채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논지를 제기해
역사의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했으며,
박은식은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라 해 소위 혼백사상을 내놓았다.
이러한 민족주의 사관은 손진태의 신민족주의 사관으로 발전됐다.
손진태는
대내적으로는
계급투쟁이 일소되고 친화와 단결이 이루어진 평등한 민주국가를,
대외적으로는
국제간 친선에 기여하는 민족 자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를 통해
민족 전체의 균등한 행복과 민족 간 친선을 이룩하는 것이
신민족주의의 과제라고 규정했다.
<백두산에서 대한국인 한재 신충우>
이글루스 등재 :2012/05/13
티스토리 이전 : 2023/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