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 신충우 파일 9

 

 

“굿은 산 자들을 위해

죽은 자의 한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1994년 개봉된 임권택 감독의 영화

<태백산맥>의 끝부분에 나오는 대사이다.

 

민족주의자 김범우(안성기)가

무당딸 소화(오정해)에게

산사람끼리 죽이는 판국에

죽은 자를 위해 정성으로 굿을 하느냐고 묻자

소화가 김범우에게 하는 말이다.

 

굿은

한국 샤머니즘(무교)의 종교 제의로,

무당이 음식을 차려 놓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귀신에게 인간의 길흉화복을 조절해 달라고 비는 의식이다.

 

2014년 개봉된 박찬경 감독의 영화 <만신>은

무녀 김금화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이다.

 

일제강점기,

14살의 금화 ‘넘세’(김새론)는 위안부 소집을 피해 시집을 가지만

시댁의 모진 구박과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친정으로 도망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듣지 못하는 걸 듣는

남다른 아이였던 넘세는

고통스러운 신병을 앓으며 유년 시절을 보낸다.

 

1948년,

열일곱 비단꽃 같은 소녀 ‘금화’(류현경)는 운명을 피하지 않고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과 북의 스파이로 오인 받아 수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산 자와 죽은 자의 아픔을 위로한다.

 

1970년대,

중년이 된 ‘금화’(문소리)는 만신으로서 이름을 알리지만

새마을 운동의 ‘미신타파’ 움직임으로 탄압과 멸시를 받는다.

여인으로서, 무속인으로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면서도

위엄과 자존감을 잃지 않던 그녀는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바꿔나가며

대한민국 최고의 나라만신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굿 보러 가자' 해서 갔더니 영화를 틀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며 나오는 천경자 선생의 말은

무속의 역할이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게 한다.

무사한 영화 촬영을 위한 김금화 만신의 고사로 시작해

쇠걸립으로 끝나는 영화는 정말 한 차례의 굿과 같다.

 

 

영화 ‘만신’포스터<출처>네이버 영화

 

 

이 영화의 제목인

만신은 민속에서 ‘무녀’(巫女)를 높여 이르는 말로,

한자를 빌려 ‘萬神’으로 적기도 한다.

 

무녀의 무(巫)자는

하늘과 땅, 죽은 자와 산 자를 잇는다는 의미를

형상화한 ‘무당 무(巫)’다.

 

무당이란

신내림을 받아 신을 섬기며

굿을 하는 여성 무속인(巫俗人)을 뜻한다.

남성을 지칭하는 말로 ‘박수’라는 단어가 있다.

그러므로 원래 여성은 무당, 남성은 박수.

그런데 현재는 혼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무당을 정리하면

중부와 북부의 전통적 강신무인 무당 박수류와

남부의 세습무인 호남의 단골, 영남의 무당,

그리고 제주도의 심방이 있다.

 

무속(巫俗)이란

무당을 중심으로 해 전승되는 종교적 현상으로,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의 아득한 상고대로부터

한민족의 종교적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또 외래종교가 들어온 뒤로도

민간신앙으로서

한민족의 기층적 종교현상으로 전승돼 왔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속담은

우리의 무속에서 나온 말로

남의 일에 쓸데없는 간섭을 하지 말고

되어 가는 형편을 보고 있다가

이익이나 얻도록 하라는 말이다.

 

한국인의 종교관을 이해하려면

그 뿌리격인 무속을 알아야 한다.

 

고대 한국인의 신앙양상은

외래종교(유·불·도)가 전래되기 이전에는

무당으로 대변되는 무교(巫敎)였다.

 

고대 한국인의 신앙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돼 있다.

 

첫째, 천신강림과 산신신앙이다.

둘째, 인간의 승화와 곡신신앙(穀神信仰)이다.

셋째, 신인융합과 창조신앙이다.

 

무속에서 보는 우주는 천상·지상·지하로 삼분된다.

이들 3계의 우주층에는 각기 해와 달과 별이 있으며

천상이나 지하에도 지상과 똑같은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무속에서는 인간을 육신과 영혼의 이원적 결합체로 보며

영혼이 육신의 생존적 원력(原力)이라 믿는다.

 

영혼은 형태가 없는 기운으로서 인간 생명의 근원이며

인간의 생명 자체를 영혼의 힘으로 믿는다.

영혼은 또 육신이 죽은 뒤에도 새로운 사람으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거나

내세인 저승으로 들어가서 영생한다고 믿는 불멸의 존재이다.

 

무속에서는 내세에 극락과 지옥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믿는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명부로 가서 시왕을 차례로 거치며

생전의 선악을 심판받아 선한 일을 한 영혼은 극락으로 보내어 영생하게 하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의 영혼은 지옥으로 보내서 영원히 온갖 형벌을 받는다고 믿는다.

 

무속의 내세관 속에는 미래에 대한 종교적 구원관념이 없다.

기독교나 불교 등의 종교가 신앙과 종교적 구원에 의해 내세를 가지게 되는 데 반해

무속에서는 현세에서의 일정한 신앙이나

종교적 구원과는 무관한 자연적 순환의 의미로 나타난다.

즉, 사람이 죽으면 영혼으로부터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게 한

근원지인 저승으로 돌아간다는 순환의 원리로 보았던 것이다.

 

샤머니즘의 샤먼(shaman)이라는 말은

시베리아의 퉁구스어로 망아(忘我)상태 중에

지식을 얻는 종교적 능력자를 의미하는 ‘사만(saman)’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샤먼을 중심으로 구성된 종교 형태를 샤머니즘(shamanism)이라고 한다.

샤먼은

인간계와 영계(靈界), 생자와 사자,

인간과 동물 사회간의 매개자로

수호령이나 수호신으로부터 힘을 받아

예언, 질병의 치료, 꿈의 해석, 악령이나 적으로부터 집단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샤먼은 신령과 직접 교류함으로써 힘을 얻지만

이 직접 교류에는 유형상 샤먼의 혼이 몸을 빠져나가

초자연계로 비상하는 엑스터시(ecstacy : 탈혼)타입과

신령이 샤먼으로 빙의(憑依)하는 타입이 있다.

아무튼 샤먼은 트랜스 상태에서 활동한다.

때로 샤먼은 반란자로서

피억압자들의 지배자 집단에 대한 종교적인 힘이 갖는

정치성도 무시할 수 없다.

 

퉁구스어족은

동부 시베리아, 만주 지역의 퉁구스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 분류이다.

전통적으로 언어학자들은 퉁구스어족을 투르크어족, 몽골어족,

경우에 따라 한국어족, 일본어족과 함께 알타이어족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한민족의 기원도 시베리아에서 수렵과 채집으로 먹고 살던

고아시아계 민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시베리아 원주민, 퉁구스계 제민족, 아이누족,

한민족을 뭉뚱그려 가리키는 표현이다.

아시아로 진출 이후 가장

먼저 북아시아와 동북아시아에서 정착한 이들로 추정된다.

언어학적으로는 이들의 언어를 고시베리아 제어라고 하는데

비교언어학적으로 친연성이 입증된 언어군은 아니다.

 

아울러 고조선의 발원지를 요서지역으로 비정하는 것이

2000년대 이후 고고학계의 통설이다.

요서지역은 몽골의 시초로 여겨지는 동호와 인접해 있으니

자연스레 교류가 잦았을 테고

부여, 고구려, 발해 역시 오랜 기간 동안 만주 일대를 통치하며

읍루, 거란, 선비족, 말갈, 돌궐 등 몽골계, 튀르크계, 통구스계 종족들을

포섭하거나 지배하면서

그들의 고유신앙을 융합시키려는 시도를 자연스레 했을 것이다.

그런만큼 한국인들의 전통 신앙이 텡그리 신앙의 한 분파였거나

최소한 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고조선이 멸망한 뒤 고조선 영역에서 세워진 나라인

고구려 또한 북방계 몽골, 튀르크 부족들의 가한신을 섬긴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에서와 달리,

일본에서는 신도 신앙의 형태로 나타난다.

 

무속은 제의 규모에 따라 분류하면

비손, 고사와 푸닥거리, 굿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간단한 무속제의가 비손이다.

두 손을 비비면서 신에게 축원을 하는 가장 간단한 무속제의이다.

그리고 신에게 바치는 제수를 차려놓고

다양한 무구로 굿판을 장식해 수명의 무당이 종합적인 연행을 하는 것이

가장 큰 규모의 무속제의인 굿이다.

이 사이에 푸닥거리가 자리한다.

푸닥거리는 주로 가볍고 작은 병인 경우에 한해

잡귀에게 겁을 줘서 병을 쫓아내는 축귀(逐鬼)적 성격이 강한

약식 무속제의이다.

큰병이나 중한 병인 경우

푸닥거리보다 규모가 큰 치병굿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국내 어느 지역에서나 행하여지는 무속의 기본제의로는

성주굿·삼신굿·지신굿·조왕굿 등 민가의 가신에게 기원하는 제의와

서낭굿·당산굿 등 마을의 수호신에게 기원하는 제의가 있다.

 

특히, 굿의 제의순서는

민가의 가신으로부터 마을의 수호신을 거쳐

우주의 천신으로 이어지며

일반 민간신앙을 집약, 체계화시키면서 무속의 굿은 진행된다.

 

따라서 무속은 민간층의 종교의식이 집약된 것으로

한민족의 정신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생활을 통해

생리화한 산 종교현상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한민족의 기층적 종교현상인 무속을

한국의 종교사적 입장에서 보면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한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조직적 형태의 종교현상은 무속이라고 하는 귀결점에 이른다.

 

무속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세 가지로 그 존재가 분열된다는 믿는다.

혼과 귀와 넋이 그것이다.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넋은 땅에 돌아가며

귀는 공중에 떠돈다.

이 귀가 일반적으로 신주로서

후손들로부터 모셔진다는 것.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귀와 신을 다른 존재로 본다.

아귀의 줄임말인 귀는 육도 중생 중의 하나로

공포스럽고 기괴한 모습을 하고

염라왕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 불교의 시각이다.

신은 여러 가지 능력을 지닌 특별한 존재이기는 하나

기독교의 개념처럼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고

정령과 비슷한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불교의 귀신에 관한 개념 및 사고는

일정한 틀이 있지 않다.

 

 

두 개의 깃발이 달린 무당집ⓒ신충우, 2023

 

세 개의 깃발이 달린 무당집ⓒ신충우, 2023

 

 

무당집은

깃발로서 표시한다.

이곳에

깃발을 다는 순간

개인의 사가가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백성을 교화하는 등

소도의 성격을 가지는

중요한 곳이 된다는 의미이다.

 

소도(蘇塗)란

고대 삼한 때에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지로

여기에 신단을 설치하고

그 앞에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워 제사를 올렸는데

죄인이 이곳으로 달아나더라도 잡아가지 못했으며

후대 민속의 ‘솟대’가 여기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한다.

 

내림굿을 하고

무당이 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신당을 모시고

집 앞에다 깃발을

꽂는 것이다.

 

무속의 깃발은

신내림을 받은 무당과

하늘을 연결하는 표시로.

내림굿을 받은

무당이

신당을 차린 것을

표시하는 신간(神竿)이다.

신령을 모시기 위해

세워 두는 깃대가 그것이다.

 

무속의 깃발 중

백색기는

천신(天神)으로

하늘을 뜻하고

적색기는

지신(地神)으로

땅을 뜻하고

황색기는

인신(人神)으로

조상이나 영웅을 뜻한다.

 

점만 보는 집은

백색기만 단다.

 

굿만 하는 집은

적색기를 단다.

 

상기의

두 깃발을 단 집은

천지신명을 모신다.

이를 천황기라 하는데

상에는 백색기,

하에는 적색기를 단다.

 

보통은

이같이 두 개의 깃발을 다는데

이들 깃발 위에 추가로

태극기를 달아 놓은 집도 있다.

백색기에 卍(만)자를

적색으로 표시한 깃발도 있다.

세 개의 깃발을 단 집은

국가규모의 큰 굿을 할 줄아는

무속인을 표시하는 집이다.

 

굿은 사회적으로

가장 힘없는 사람들-

할머니, 아줌마, 아이, 환자들의 해방구다.

무당과 이들이

함께 웃고 울고 춤추고

음식을 나누면서

화해와 용서로 공동체를 다지는 것이다.

 

필자도 60년 전

유년기에는 그 일원이었다.

동네에서 굿을 하면

빠지지 않고 참석해

함께 신나게 놀았다.

 

현대 한국인들은

겉으로는 무속을 멸시하는 경향이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면

점을 보거나 굿을 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사무실을 개소하거나

공장에  비싼 기계를 들일 때

전통적으로 행해지는

고사를 지내는 민가의 풍습도

그런 기복신앙이다.

 

미술평론가 최광진의 백남준에 대한 평가로

한국인의 기층적 종교현상 무속(巫俗)에 대한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한국인으로서

20세기에 가장 뚜렷한 족적은 남긴 예술가는 백남준으로

그의 국제적 성공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의 예술적 뿌리는

어린 시절 체험한 한국의 무속문화에서 비롯해

산 자와 죽은 자, 이승과 저승을 소통시키는 무당처럼

그는 방울(거울) 대신 비디오(TV)를 이용해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소통시키려고 했다.”

 

<‘한’연구가/저술가 한재 신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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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립보행하는

사람(人)은

땅(地)을 딛고

하늘(天)을 향해

우뚝 서 있는

형상이다.

 

이를 일컬어

천지인(天地人)이라 부른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고 해서

사상적으로는

일원론(一元論)이라 칭한다.

 

이것이

우리 한국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한글에도 이 사상이 담겨 있다.

 

동양의 일원론은

우주와 나는

하나에서 비롯됐다는 개념으로

서양의 신과 인간을 분리하는

이원론(二元論)에 반하는 개념이다.

 

종교적으로

동양을 대변하는

석가교는 일원론이고

서양을 대변하는

예수교는 이원론이다.

 

석가모니는

이원론의 힌두교에서 해탈해

일원론의 불교를 창시했다.

인도는 아시아에 속해 있지만

언어적으로는 유럽과 같은 어군이다.

 

일원론과 이원론의 분기점은

파미르고원으로

서쪽은 이원론이 지배하고

동쪽은 일원론이 지배한다.

 

서양은

신과 인간을 분리함으로써

선과 악, 남자와 여자,

인간과 자연, 백인과 유색인 등

세상을 이항대립으로 구분 짓고

신이 인간을 지배하듯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는 억압하는

가치관을 보편화시켰다.

 

철학적으로

이항대립의 기원은 플라톤에서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은 <소피스테스>에서

보편적 개념을 하부개념으로 분할하면서

이항 대립적 대조항을 활용했다.

 

동양의 일원론 사상은

내 안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음양, 선악은

모두 내 안에 존재하며

내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그것을 찾아가는 깨달음을 강조한다.

 

서양과 같이

신에게 복종하고 헌신하는

삶이 아닌,

침잠(沈潛)하고 사유하고

내 안에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

내가 우주(신)가 되어가는

삶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동양의 일원론이다.

 

대한민국의 하늘ⓒ신충우, 2023

 

 

우리가 매일 접하는

하늘은

낮에는 끝없이 푸른 창공이고

밤에는 수많은 별빛이 빛난다.

경외감(敬畏感)이 느껴진다.

 

하늘과 우주는 다른 개념이지만

우리 민족이 생각하는 개념은

같은 개념으로

하느님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하느님’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하늘은

사전적으로

지평선 또는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으로

과학적으로 정확히 말하면

하늘은 머리 위에 따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눈높이 위로 펼쳐지는 대기권의 가시영역 전체를 말한다.

 

하늘은 순우리말로

과거 중세 한국어 때는 ‘하ᄂᆞᆶ’의 형태로 나타났다.

하ᄂᆞᆶ은 모음이나 ㄱ, ㄷ, ㅂ 앞에서는 ㅎ이 나타나고

그 이외에서는 ㅎ이 나타나지 않는 ㅎ 말음 체언이었다.

이후 ㅎ이 완전히 탈락하고 어중의 아래아가 ‘ㅡ’가 됐다.

 

한자어 우주(宇宙)는

무한한 시간과 만물을 포함하고 있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로

물리적으로는 물질과 복사가 존재하는 모든 공간이다.

자연은 우주의 유의어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우주의 일부 공간이자, 자연의 일부이다.

 

이 하늘에서

한국인의 경천사상이 나왔다.

 

경천사상(敬天思想)은

하늘을 절대자로 숭배하는 사상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환하고 끝이 없는 하늘을

숭상하며 살아왔다.

그러기에

우리 민족을 일컬어 예맥족이라 칭했는데

이는 밝음을 뜻하는 말이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우리 민족의 홍익 인간 정신도

경천 사상에서 비롯됐다.

 

우리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잘못된 일을 저지른 사람을 가리켜서

‘천벌을 받을 사람’이라 한다.

천벌이란 곧 하늘이 내리는 벌임과 동시에

우리 민족이 가장 두려워하는 근원적인 처벌이

하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경천사상은

하늘을 도덕적인 양심의 원천으로 여김으로써

도덕적 삶을 영위해 나가려는

하나의 생활 철학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해 왔다.

 

한국인의 약 60%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지만

하늘숭배와 조상숭배 사상은

천부적으로 대부분 가지고 있다.

 

이 두 사상은

천제(天祭)로 연결된다.

하늘숭배에서

천제가 나오고

천제에서

조상숭배가 나왔다.

 

천제(天祭)는

한민족 역사 속의 천제의식으로

우리민족 고유의 천손문화이다.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천제는

보이지 않는 신과 하늘과 소통하는 삶을 살아온

우리 민족의 고유한 신관과 유기적인 세계관,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천손문화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는

시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져 왔다.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東盟), 삼한의 수릿날과 시월제등이

우리 민족이 지켜오던 천제의식이다.

신라와 고려의 팔관회(八關會)와

고려와 조선에서 행해졌던 원구제(圜丘祭)도

국가적으로 지켜오던 천제 가운데 하나이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우리 애국가에 나오는 ‘하느님’이다.

 

과거에는 하느님을

천지신명, 옥황상제 등으로 표현했다.

 

대하 사극 ‘주몽’에서는

천지신명으로 표현한다.

 

천지신명 (天地神明)이란

천지의 조화를 주재하는 온갖 신령으로

유의어로 신과 하늘이 있다.

 

원불교에서의 천지신명의 개념은

진리 당체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한다.

우주에 꽉차있는 기운

그리고 우리 인간의 본래 성품을 의미하는 뜻으로

일원상 진리의 초기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옥황상제(玉皇上帝)는

하늘을 다스리는 신으로 하늘에 있는 신령들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신으로

원래는 중국의 민간 도교에서 받드는 최고신의 명칭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무당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신격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하늘을 주재하는 신격으로 인식해

하느님과 동일시 된다

 

북방의 알타이어로는

텡그리(tengri)라고 한다.

<한서(漢書)>에는

이를 음차해 한자로

撑犁(탱리)라고 기록돼 있다.

하늘과 천신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하느님이란 용어는

17세기 이후에 등장한 말이다.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고 믿어지는

초자연적인 절대자로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서

각각의 종교에 따라

여러 가지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불가사의한 능력으로써 선악을 판단하고

길흉화복을 인간에게 내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느님’은

‘하늘’과 ‘님’이 결합해 이루어진 단어이다.

‘하늘’이 본디 ‘하날[’날‘의 모음은 아래아(ㆍ)]’이어서,

국어의 변화에 따라

‘하늘’로 되기도 하고 ‘하날’로 읽힌 적도 있어서,

‘하느님’과 ‘하나님’의 두 형태가 현대에 정착됐다.

‘하느님’은 일반적인 의미의 ‘신’을 가리키고

‘하나님’은 특정 종교에서 신봉하는

유일신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므로,

결국 ‘하느님’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국어의 발달에서 이러한 의미의 분화는

언어 변화의 논리에 의한 것은 아니다.

‘하날(모음은 아래아)님’에서는 ‘하느님’도,

‘하나님’도 모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17세기 편지글에서

‘하나(모음은 아래아)님’으로 처음 나타난다.

이 형태는 ‘하날(모음은 아래아)+-님’의 결합에서

‘ㄴ’ 앞의 ‘ㄹ’이 탈락된 결과이다.

물론 이 글에서 ‘하나(모음은 아래아)님’의 의미는

일반적인 의미의 ‘하늘에 계신 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편지글이 아닌 문헌자료에서는 18세기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19세기에는 ‘하날(모음은 아래아)님’으로부터

‘한우님’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가 나타나는데

‘하?님’은 원래의 구성인 ‘하날(모음은 아래아)+-님’을 의식해 적은 것이며

‘한우님’은 ‘하느님’의 모음이 전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그 원래 구성인 ‘하날(모음은 아래아)님’에서

현재의 ‘하느님’에 이르기까지 의미상의 큰 변화를 입지는 않았다.

다만 종교 단체에 의한 의미의 전용이 있어

해당 종교에서 특수한 의미를 갖는 말로 구별하기 위해

‘하나님’을 선택해 쓰고 있다.

<출처> 21세기 세종계획 누리집 한민족 언어 정보 국어 어휘의 역사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는

어떤 외래종교는

같은 의미의 신에 대한 고유용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경천사상을 이용해 선교하기 위해

우리의 하느님과 하나님을 도용해 쓰고 있다.

부도덕적인 야바위꾼들이나 하는 속임수다.

 

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인

이슬람교에서는 알라(Allāh)를 내세워

떳떳하게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끝으로

조상숭배와 제사를 살펴보면

이들은 천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늘(텡그리)→경천사상→하느님→천제→조상숭배→제사→화목(효와우애)

 

자기를 있게 한

조상에 대해 숭배하는 것은

진화생물학적으로

지극히 인간다운 도리이다.

 

제사때 쓰는 촛대ⓒ신충우, 2023

 

 

조상 숭배(祖上崇拜)는

죽은 조상의 은덕에 후손들이 감사하는 풍습으로

집단의 사회적 연대를 강화ㆍ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조선시대 이후 유교의 영향을 받아

제사가 체계적으로 제도화된 점은 있으나

종교의식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으로

죽은 자를 위한 의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산 자(후손)들을 위한 의식이다.

제사를 통해

후손들이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며

화목하게 지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왜 자기를 있게 한

생물학적인 조상이 우상인가.

 

1939년 12월 18일 로마교황 비오 12세는

“조상숭배는

하나의 시민적 의식일 뿐

종교적 의식은 아니라”는 내용의 교서를 공표해

제사를 허용한 바 있다.

 

<‘한’연구가/저술가 한재 신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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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 신충우 파일 7

 

 

신라와 고구려는

어느 쪽이 역사의 승자일까.

 

‘태조 왕건’을 보면서 갖는 생각이다.

 

 

‘태조왕건’은 KBS1의 대하사극으로

2000년 4월부터 2002년 2월까지

무려 200회에 걸쳐 방영됐는데

요즘에도 케이블TV를 통해 재방이 되고 있다.

시간대가 맞으면 나도 가끔 본다.

 

고려 태조 10년(927) 9월.

견훤은 경상도 북부를 공략하다가

느닷없이 말머리를 돌려 서라벌을 기습했다.

신라는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구원병이 이르기 전에

서라벌은 함락당하고 말았다.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새 임금으로 앉힌 뒤

수많은 재물을 약탈해 돌아갔다.

이에 노한 왕건이 친히 기병 5000을 거느리고

견훤을 치러 내려갔다.

고려와 후백제 양군은

오늘의 대구 팔공산 동쪽 은해사 들머리에서 맞붙었다.

 

태조 왕건1578회에 나오는 내용이다.

 

◇신라 쇠퇴기의 역대 왕들

 

46대 문성왕 김경웅(45대 신무왕의 장남)

47대 헌안왕 김의정(45대 신무왕의 이복동생)

48대 경문왕 김응렴(43대 희강왕의 손자)

49대 헌강왕 김정(48대 경문왕의 장남)

50대 정강왕 김황(48대 경문왕의 차남)

51대 진성왕 김만(48대 경문왕의 딸)

52대 효공왕 김요(49대 헌강왕의 서자)

 

53대 신덕왕 박경휘

(52대 효공왕의 처남으로

8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의 후손)

 

54대 경명왕 박승영(53대 신덕왕의 아들)

55대 경애왕 박위응(54대 경명왕의 동생)

56대 경순왕 김부(46대 문성왕의 후손)

 

신라 패망의 원인은

김씨 왕조에 있는가.

박씨 왕조에 있는가.

공교롭게도

후백제 때문에 김씨가

패망의 대미를 장식한다.

 

상기의 표와 같이

신덕왕의 즉위는

신라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데

바로 후기 박씨 왕조의 초대 왕으로써

제8대 아달라 이사금이 승하하고

728년만에 박씨 왕이 다시 즉위한 것이다.

 

왕위에 오른 신덕왕은

아버지를 선성대왕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를 정화태후로 봉했다.

 

경문왕계가 4대 연속으로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53대 신덕왕(박경휘)이 49대 헌강왕(김정)의 사위로

경문왕가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신덕왕은 효공왕(김요)의 처남이기도 했는데

신덕왕의 양아버지 박예겸의 딸이 효공왕의 왕비로 들어갔다.

과거 석탈해나 김미추가 전 왕과 성씨가 다른데도

왕위에 올랐던 과정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것이다.

다만 석탈해나 김미추는 임시로 왕위를 물려받고

다시 원래 성씨에게 왕위가 넘어갔던 케이스지만

신덕왕은 즉위한 직후,

아들 박승영을 태자로 삼아서 앞으로도 박씨로 이어진다고

대내외에 후계 구도를 명확히 선언했다.

이는 진성여왕과 효공왕을 거치며

너덜너덜해진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에 의해 성골이 폐지되고

진골 왕위 계승 체제가 확립되었으면서도

시조묘와 신궁 등 나정 주변에서

박혁거세와 하늘신에 대한 제사는 계속 지내져오고 있었고

박씨가 신라의 시조로써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며

계통이 꾸준히 이어져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덕왕은 본인에 그치지 않고 박씨 계승이

그의 아들들에게 이후 계속된다는 점에서

적어도 신덕왕의 시대에는 박씨가 신라 조정의 실권을 잡고

박씨 왕조를 회복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동안 박씨가 숙청되지 않고 중앙의 귀족으로써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의 경문왕·헌강왕 때에는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시도됐으나

이미 대세를 만회하기에는 늦었고

정강왕의 뒤를 이어 진성여왕이 즉위했을 때에는

사태가 절망적이라 국가재정은 파탄에 직면하고 말았다.

889년(진성여왕 3)에 조정이 재정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지방의 주군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들의 반란을 유발했고

조정이 끝내

이를 수습하지 못해 장기간의 내란기에 접어들게 됐다.

 

이 시기는 왕통상으로 전기의 계승, 연장이었으나

신라는 50년 가까운 내란 끝에 쇠망기에 접어든다.

이 시기에

신덕왕·경명왕·경애왕 등 박씨왕이 3대에 걸쳐서

15년 간(912∼927) 재위했으나

그들은 김씨 왕통과 혼인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 시기는 신라가 국가로써의 통제력을 상실해

군웅들이 전국 도처에서 할거해도 통제할 수 없었다.

지방뿐만 아니라 왕경 자체도 무방비상태가 돼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赤袴賊)이

왕경의 서부 모량리까지 진출할 정도였고

927년에는 후백제의 왕 견훤이 군대를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 와 경애왕을 죽이고

김씨 왕통 출신의 경순왕을 세우기까지 했다.

 

이 시대의 주역은 전국 각지에 자립하고 있던 군웅들이며

그 가운데서도

백제와 고구려의 국가 부흥을 부르짖으며 궐기한

견훤과 궁예였다.

신라는 이들이 서로 대결하는 동안 여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918년에 궁예를 쓰러뜨리고 즉위한 고려 태조 왕건이

정책상 신라와의 친선정책을 꾀하게 됨에 따라

수명을 다소간 연장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가 후백제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되자

경순왕은 935년 11월

고려에 자진 항복해 신라는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신라 경순왕릉<출처>한국관광공사/나무위키

 

 

경순왕릉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소재한다.

사적 제244호.

경순왕은 신라 마지막 왕으로,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한 후

경주를 떠나서 개경 근처에서 살아야 했고

죽어서도 신라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시 바깥에 묻혔다.

즉, 다른 신라왕릉은 경북 경주시에 있지만

경순왕릉만 유일하게 경기도 연천군에 있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 실전됐다가

1747년(조선 영조 23년)때 발견돼

석물 등을 정비하고 관리하게 했다.

 

신라와 고구려의 역사전쟁은

비록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협공으로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신라를 흡수통합해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써

고구려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신라와 고구려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경주(신라)역사유적지구는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고구려 유적은

2004년

중국과 북한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등재된 고구려 유적은 세가지.

1, 중국 환인 오녀산성

2, 중국 집안 광개토대왕비

3, 중국과 북한 고구려고분군

중국쪽의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가

국내성 시대의 고구려 초중기 고분군 위주라면

북한쪽은 고구려 중후기 고분군 위주이다.

 

개성(고려)역사유적지구도

북한에 의해

201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우리 대한민국의 영문국호

KOREA(코리아)는

고려(高麗)에서 나온 것으로

고구려(高句麗)의 준말이다.

불어로는 꼬레(coree)라고 표기하는데

고려의 원음에 가장 가깝다.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켜

민족 주체적인 시각에서

부여→고구려→발행→고려를

우리 역사의 척추로 보았다.

사대적인 신라중심의 역사를

고구려중심의 역사로 바로 잡은 것이다.

 

그의 호 단재(丹齋)도

잃어버린 고구려의 고토를

되찾으려고 했던 최영 장군의

기개와 정신을 높이 사

그의 단심가(丹心歌)에서 단을 따와

지은 것이다.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라

님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 있으라”

 

일편단심을 강조한

최영의 단심가다.

단재(丹齋)는 바로

이 일편단심을 의미한다.

 

이같은 시각에서

고려시대 묘청의 난을

마지막 고구려인 단재 선생은

'조선역사상 1천년내의 제1대 사건’이라고

민족의 자주적인 측면에서 높이 평가했다.

 

묘청의난이란

고려 인종 13년(1135),

묘청이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다가

‘삼국사기’의 편자 김부식 등의 반대로 실패하자 일으킨 반란이다.

 

 

집안의 광개토대왕비ⓒ신충우, 2012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압록강변 집안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있노라면

고구려 전성기의 위용이 느껴진다.

 

필자는 이를 가슴에 품고 산다.

 

 

<‘한’연구가/저술가 한재 신충우>

 

 
Posted by 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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